나는 누구인가? 참나를 찾아서는, 이 몸이 아닌 진정한 나를 알아가기 위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기 쉽게 해설해 놓은 경전입니다.
▣ 목 차
세상에는 많은 종교(宗敎)가 있습니다. 종교 또한 사람이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사람이 이름 붙여 놓은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자신의 몸을 ‘나’라 하고 ‘생각’을 ‘내 마음’이라고 착각하는 ‘나의 생각’ 또한 이 〈마음〉이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우주 속에 있는 모든 세계를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라고 합니다. 이 모든 것 또한 〈마음〉이 지어 놓은 것이라 합니다. 〈마음〉은 붙잡을 수 없고, 보이지 않지만, 없는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 말이나 글로는 설명할 수 없고 나타내 보일 수 없지만 말입니다. 참으로 공(空)한 것입니다. 〈공〉이라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으로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한글로는 〈마음〉이라 하고, 한문으로는 〈心〉이라 하고, 영어로는 〈Heart〉라 합니다. 민족과 말과 문자가 달라도 〈마음〉은 없는 곳이 없습니다. 누구나 알고 있고, 느끼고 있고,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로 말하자면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 만들어 놓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구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흔히들 말합니다. 「세상일이 마음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라고, 그 이유는 마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이다, 너의 마음이다, 라고 하는 것은 마음이 만들어 놓은 ‘나의 생각’과 ‘너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지 이 〈마음〉에는 ‘나’와 ‘너’가 없는 것입니다. 무엇을, 어디까지를 ‘나’라 하고, 또한 무엇을, 어디까지를 ‘너’라 할까요? 누구나 잠을 자면서 꿈을 꿉니다. 꿈속에서 보이는 것과 보는 것은 무엇이 보이고 무엇이 보는 걸까요? 꿈을 깨고 나면, 꿈속에 있던 세상은 모두 사라지고 아무것도 없는데, 그 꿈속의 세상은 누가 만들어 놓은 것일까요? 눈을 감고 잠을 잡니다. 눈을 뜨고 잠을 자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잠을 자면서 꿈을 꿀 때에, 이 눈을 감고 있는데, 무엇이 볼까요? 몸은 자고 있고 움직이질 않는데, 무엇이 걸어 다니고, 뛰어다니고, 심지어는 하늘을 날
아다니고 할까요? 물속에 들어가도 숨 가쁘지 않고, 불속에 들어가도 뜨겁지 않습니다. 이러한 알 수 없는 이름이 마음인, 마음을 깨우치고 항복 받으신 분이,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 세존 〉이십니다. 인류는 역사가 있습니다. 민족과 나라마다 서로 다릅니다. 역사가 기록되었다고 하지만, 그것도 글(문자)이 생겨난 후에 일입니다. 그전에는 말로써, 구전으로 전해왔기 때문에, 어느 역사이던지 아무리 위대한 문명이라 해도 시점이 없습니다. 꿈을 꿀 때 그 세상이 시작이 없는 것처럼, 현실이라고 하는 이 세상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언제부터 있었는지를 밝히지 못합니다. 시작이 없고 시작이 없기 때문에 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마음〉 속에 살면서 〈마음〉을 모릅니다. 이 세상은 상대적인 모든 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뜨거운 것이 있고, 반대로 차가운 것이 있으며, 길다고 하면, 반대로 짧은 것이 생겨납니다. 더러운 것이라 하면, 반대로 깨끗한 것이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길다 라고 하는 말 속에는 짧은 것이 포함되어 있고, 짧은 것이라 하면, 그 속에는 긴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긴 것이라 하면 긴 것보다 더 긴 것이 있으면, 더 긴 것에 비하면 짧은 것이 되고, 짧은 것이라 하면, 더 짧은 것에게는 긴 것이 되는 것이고, 더러운 것도 마찬가지로 더욱 더러운 것이 비해서는 깨끗한 것이 되고, 깨끗하다는 것도 더 깨끗한 것에 비해서는 더러운 것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 세상 어떠한 것도 죽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절대 죽지 않는 그 무엇이 있는 것입니다. 시작이 있으므로 끝이 있고, 생겨남으로서 반드시 소명해 갑니다. 태어남으로서 죽음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작이 없고, 생겨남이 없고, 태어남이 없는 그 무언가 있는 것입니다. 이름하여 〈마음〉이라 합니다. 이 〈마음〉을 깨우치시고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마음〉을 밝혀주신 분이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 세존(世尊)〉
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부터 〈부처님〉을 배우고자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불교(佛敎)는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입니다. 우리나라에 전해온 〈부처님〉의 가르침은 제자들에 의하여 구전으로 전해오고 문자가 생겨난 후에는 그 누군가에 의하여 문자로 기록되고 또 다른 문자로 기록되어 온 것입니다. 그때 당시에는 정확한 시점이 없고, 오늘날처럼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의 세상이기 때문에, 나무토막이나 옷감에 기록되어 전해온 것으로 알고 있는 정도일 뿐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 시대를 상상하지 못합니다. 신분이 정해져 있는 세상에 사람이 사람을 노예와 종으로 부리던 세상을 살아보지 못한 현대의 몇몇의 역사 학자와 불교학자(?)라는 사람들이, 알량한 역사(?)라는 기록을 가지고, 진실 운운하는 것은 장님이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다고 떠들어대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요. 따라서 우리는 〈인도불교(印度佛敎)〉에 대한 여러 가지 전하는 변천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 인도불교 ] 인도는 〈불타〉의 탄생지로서 불교사에서 가장 중요한 지위를 정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석가세존〉의 가르침은 세계적으로 전하여졌는데 반하여, 인도에서는 13세기경에 종말을 고한 후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을 뿐, 불교가 없는 것입니다. 〈인도불교(印度佛敎)〉의 변천의 역사는 첫째는 원시불교, 둘째는 부파불교, 세 번째는 대승불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1)〈원시불교〉 〈원시불교〉라는 뜻은 처음 창시기의 불교를 말함이고, 〈석가·세존〉께서 입멸하신 후 〈석가·세존〉 생애 중의 가르침을 제자들이 수집, 정리하여 만들어 놓은 것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전해오는 경전의 기본 틀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석가·세존〉 입적
후 약 100여년 동안을 〈원시불교〉라 하고 모든 면으로 완전한 통일이 유지되었다고 합니다. 2)〈부파불교〉 〈석가·세존〉 입멸 후 100여 년이 지난 무렵부터 교단의 확대에 따라 내부에 의견 대립이 나타나 보수적인 〈상좌부(上座部)〉와 혁신적인 〈대중부(大衆部)〉의 두 집단으로 분열된 후 서로서로 계속 분열되어 20개의 부파로 분열되었고, 이것을 소승 20부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상좌부〉 불교는 남방 불교로서 오늘에 전하고, 〈소승불교〉입니다. 〈대중부〉 불교는 후일 〈대승불교〉로 발전한 것입니다. 3)〈대승불교〉 출가 신자(승려) 중심인 종래의 불교에 대하여 재가 신자를 포함하는 신앙으로의 탈피를 원하는 대승의 운동이 인도 각지에서 일어났다고 합니다. 재가 신자의 집단인 〈보살단(菩薩團)〉이 합체하여 초기 대승불교가 성립되었다 합니다. B.C 1세기~ AD 2세기에 걸쳐(이때 종이가 발명되고, 옷감이 발달한 시기이므로) 〈반야경〉, 〈법화경〉, 〈유마경〉, 〈화엄경〉, 〈무량수경〉 등의 대승 경전이 차례로 성립되었고, 〈용수보살〉에 의한 이론적인 근거가 부여 되면서 대승불교의 확립을 보았다고 합니다. ------------------------- 〈마명(馬鳴)100년~160년경〉 중인도 마갈타국(사위국 출신이라고도 한다.) 사람으로 〈석가·세존〉 입멸 후 600년경에 출세한 대승의 논사. 본디 외도의 집에 나서 논의를 잘하며 불법을 헐뜯음. 〈협존자〉가 북쪽에서 와서 토론을 하여 설복하자, 그의 제자가 되었다 하고, 과거에 이미 성불한 부처님으로 명호는 〈대광명불(大光明佛)〉이었다 합니다. 〈용수(龍樹)〉 〈석가·세존〉 입멸 후 6~7백 년경(B.C 2~3세기)의 남인도(혹은 서인도) 승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모든 학문에 능통함. 처음에 인생의 향락은
정욕을 누리는 데에 있다하며, 두 벗과 함께 주색에 빠져 왕궁에 출입하면서 궁녀들과 통하다가 일이 탄로되어 두 벗은 사형을 당하고, 그는 간신히 위험을 면하였음. 욕락은 괴로움의 근본이 되는 것을 깨닫고, 출가하여 소승 3장을 배우다가 만족하지 못하여 설산 지방으로 감. 노승 비구를 만나 대승 경전을 공부하고, 여러 곳으로 다니면서 대승 경전을 구하여 깊은 뜻을 통달함. 용궁에 들어가 〈화엄경〉을 가져오고 남천축의 철탑을 열고, 「금강정경」을 얻었다 함. 〈마명〉의 뒤에 출세하여 대승법문을 성대히 선양하니, 대승불교가 이로부터 발흥하였으므로 후세에 그를 제2의 석가·8종의 조사라 일컬음. 과거에 성불한 부처님으로 명호는 〈묘운상불(妙雲相佛)〉이었다 합니다. ------------------------- 〈불교〉에는 〈삼보(三寶)〉가 첫째로의 구성요소입니다. 세 가지 보배라는 뜻입니다. 첫째는 〈부처님〉입니다. 두 번째는 〈법(法)〉, 즉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합니다. 세 번째는 〈승(僧)〉입니다. 〈소승〉에서는 〈승려〉를 말하지만, 〈대승〉에서는 부처님 가르침을 이어가는 모든 사람, 더욱 자세히 말하자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이어가는 사람의 마음자리를 말합니다. 1) 〈부처님〉은, 소승에서는 〈석가·세존〉처럼 절대의 진리를 깨달은 사람을 말하지만, 〈대승〉에서는 다음 세 가지로 나누어 말합니다. ◦첫째로는 〈법신(法身)〉이라 합니다. 모습이 아닌 진리 그 자체를 말합니다. 공(空)으로서 있는 〈마음자리〉를 뜻합니다. ◦둘째로는 〈화신(化身)〉이라 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중생을 교화하고 구제하기 위하여 부처님 자신이 중생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나타난 것을 말합니다. ◦셋째로는 〈응신(應身)〉이라 합니다.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무제한 속에 임시로 제한을 가지고 나타나는 부처님의 모습을 말합니다. 꿈속이나 그 사람 눈에만 보이는
모습을 말합니다. 진리(眞理)라고 하면서도 〈진리〉가 무엇인지 설명하지 못합니다. ‘태양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라는 것이 진리라고 하지만, 정말 잘못된 말이고, 장님이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다고 하는 소리와 다를게 없습니다. 태양은 그 자리에서 움직인 적이 없는데 ‘뜨고 진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처음부터 〈동,서,남,북〉이 정해질 수 없는 것입니다. 동쪽에서 보면 북쪽이 되고, 북쪽에서 보면 남쪽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남쪽에서 보면, 북쪽이 되고, 북쪽에서 보면, 남쪽이 됩니다. 또한 우주에 있는 어떠한 별(태양)이라 해도 언젠가는 사라져 없어집니다. 생겨났기 때문에 언젠가는 사라져 없어지는 것입니다. 〈생·멸〉이 있는 것은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진리는 생겨남이 없고 생겨남이 없기 때문에 멸함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하고, 또한 이것을 확인하는 것을 〈무생법인(無生法忍)〉이라 합니다. 생겨남이 없고 멸함도 없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가 이름 지어 부르는 〈마음〉입니다. 문제는 〈마음〉을 모르면서 〈마음〉이 낸 〈생각〉을 마음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문제입니다. 마음을 모르고 이 〈육신〉의 몸을 ‘나’라고 착각하며 살아가는 존재를 〈중생(衆生)〉 또는 〈유정(有情)〉이라 합니다. 반면에 〈마음〉을 깨우치고 항복 받은 분을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중생들은 눈이 보는 줄 알고, 귀가 듣는 줄 압니다.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보고, 머리(두뇌)로 생각하고, 몸으로 접촉을 느끼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마음〉이 눈을 통하여 보고, 귀를 통해서 듣고, 코를 통해서 냄새를 맡고, 혀를 통해서 맛을 봅니다. 머리(두뇌)를 통하여 생각하고, 몸을 통하여 접촉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이 절박한 상태가 되어서 무엇인가 골똘해지면,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습니다. 도둑놈이 자신 호주머니를 다 뒤져 돈을 가져가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끼고 하는 공(空)으로서 있는, 없는 것으로서 있는, 이 〈마음〉을 빼놓고는 따로 진리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끼는 이것을 심성(心性)이라고 합니다. 마음의 성품(性品)인 것입니다. 이 〈심성〉이 불성(佛性)이므로, 모두가 본래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심시불(卽心是佛)〉 곧, 〈마음이 부처님〉이다. 라는 말입니다. 문제는 스스로 있는 〈마음의 성품〉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나고 죽는 이 몸을 ‘나’로 살기 때문에, 죽지도 않고, 나지도 않는, 변하지 않고, 항상 있는 〈마음의 성품〉, 즉 〈참 나〉를 알 수 없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옛말에 「업은 아기를 3년 찾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자신이 업고 있으면서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찾고 다니는 것입니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찾을 수 없습니다. 결국에는 자신이 등에 업고 있으면서도 다른 곳에 있는 줄 아는 〈어리석음〉, 즉 〈무명〉에 가리운 것입니다. 그림자를 보고 그것이 진짜인 줄 아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자동차가 지나가면 자동차가 간다고 합니다. 자동차 스스로는 움직일 수 없습니다. 운전수가 운전하는데로 움직이고 서고 하는 것입니다. 비유하면 사람 몸은 자동차이고, 운전수는 이름이 마음인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은 성품(性品)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생각을 내고, 느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空)으로서 있는 것이기 때문에, 없는 것으로서 있는 줄을 모르고, 가짜인 몸이(눈이, 귀가, 코가, 혀가, 두뇌가 피부인 껍데기가)하는 줄 압니다. 그래서 〈견성(見性)〉, 〈성불(成佛)〉이란 말이 〈선종(禪宗)〉에서 비롯되어 오늘날 〈견성성불〉로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견성〉이란, 마음이란 〈성품〉을 보았다. 발견했다,라는 말입니다. 〈견성〉을 하면, 〈성불〉한다는 말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음〉이란 〈진리〉 그 자체로서 시작도 없을 적부터 스스로 〈성불(成佛)〉해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 그 어떠한 것도 모두 이 〈마음〉이 나타난 것이라고 〈부처님·세존〉께
서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을 떠나서는 그 어떤 것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얼굴을 스스로 볼 수 없는 것처럼, 이 몸을 ‘나’라고 알고 있는 이상, 마음의 〈성품〉을 따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눈을 통해서 보고, 귀를 통해서 듣는다,라는 말을 이해하고 긍정을 해도(어떤 사람들은 이말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너무나도 이몸이 ‘나’라고 하는 집착과 습관이 깊이 배어있는 것입니다.), 아직은 생각을 통해서 알려고 하기 때문에 알듯 알듯하지만,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눈을 통해서 본다, 귀를 통해서 듣는다.〉라는 생각은 이미 마음이 낸 생각이기 때문에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생각은 마음의 그림자입니다. 생각이 마음이 낸 그림자인 줄 모르기 때문에, 그림자를 붙잡고 실체인 줄 알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외국의 어느 유명한 사상가가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인간은 생각(고뇌)하기 때문에 존재한다.」라고, 그럴듯합니다. 어느 견성(見性)하신 스님이 이 말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눈물 나게 서러운 말이다.」라고, 여기에는 이런 뜻이 담겨 있습니다. 무엇이 생각하는 줄 모르고, 무엇이 존재하는 줄 모르기 때문에 이런 눈물 나게 서러운 말을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부처님이 무엇인지 모르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나지 못한 애틋함으로 동정 어린 말씀이기도 합니다. 저런 사람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났더라면...하는 간절함이 배어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사람이 존재하는 줄 아는 것입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합니다. 세상에 나타난 모든 것이 항시 변하면서 사라지는데, 멈춤이 없습니다. 이 몸부터 살펴보면 조금 〈전〉과 〈후〉가 다르게 변해 있습니다. 산다고 하는 것은 죽어간다고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합니다. 세상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 몸을 ‘나’라고 하지만, 시시각각 변하고 결국에는 사라지는 것이지, ‘나’라고 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마음은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온갖 〈거짓의
‘나’〉가 생겨납니다. 〈불교사전〉에는 〈무아〉를 「‘나’를 가지지 않는 것.」이라고 나와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불교사전〉이라는 제목부터 잘못되었다고 봅니다. 〈부처님〉이 직접 적으신 것이라면, 만드신 것이라면, 몰라도 말입니다. 〈불교 용어 해설집〉이라고 해야 옳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잘못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을 남에게 전달하는 것이야말로, 특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못 전달하는 것은 큰 죄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염려하여 〈부처님·세존〉께서는 이와 같은 말씀을 남기시면 당부하셨습니다. 『 먼 훗날 〈말법〉 세상에는 부처님의 이름을 빌린 많은 잘못된 말들이 〈경전〉이 되어서 세상에 널리 퍼질 것이다. 진실한 나의 제자들은, 항상 정견(正見)을 가지고, 아무리 부처님께서 설하셨다고 하더라도, 잘못된 가르침은 절대 따르지 말고, 다른 이에게도 전하지 말라. 』고 하셨습니다. 〈무아〉라는 단어의 뜻은 ‘나’가 없다.라는 말입니다. 〈‘나’를 자지지 않는 것.〉이라 하면, 〈‘나’를 가지지 않는 것.〉이 내가 됩니다. 「그 말이 그 말이지」라고 넘어갈 수도 있으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확실하고 또렷이 전달 되어야 합니다.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라는 말의 의미를 새겨보아야 합니다. 계속해서 말하자면, 〈마음〉은 〈무념(無念)〉·〈무상(無想)〉입니다. 따로 〈이념〉과 〈생각〉이 없기 때문에, 온갖 다른 〈이념〉과 〈생각〉이 생겨납니다. 모두 거짓의 〈번뇌·망상〉인 것입니다. 처음부터 〈번뇌·망상〉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이름을 ‘나’로 잘못 알고 〈무명〉으로 지어 놓은 모든 것이 인연 따라 나타나는 것입니다. 내가 지은 것은 나에게 나타납니다. 〈복〉을 지었으면 〈복〉이 나타나고, 〈업(業)〉을 지었으면 그 지은 업에 따라 〈괴로움〉과 〈즐거움〉으로 나타납니다. 또한 마
음은 〈무상(無想)〉으로서 모습 〈형(形)〉이 없기 때문에, 온갖 모습을 나타내고, 〈무주(無住)〉로서 머무는 곳이 없으므로 없는 곳이 없습니다. 또한 꿈을 꿀때에 그 꿈속의 세상처럼, 이 세상도 시작이 없습니다. 시작이 없다.라는 말을 〈무시(無始)〉라 하는데, 그 뜻은 일체 〈세간(世間)〉의 중생과 법이 모두 처음이 없는 것처럼, 금생은 전생의 인연 따라 존재하고, 전생은 그 이전의 전생을 따라 존재하는 것처럼, 이와 같이 추구해 들어가면 〈중생과 법〉이라고 하는 것도 원래 얻을 수 없으므로 〈무시(無始)〉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말은 ‘진리는 문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이 됩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마음이 나타난 것으로서 먼지 터럭 하나까지도 모두 진리 속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 빼놓고 진리가 따로 없기 때문에, 〈마음〉이란 문자나 말(언어)로써 절대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사실, 이것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불립문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이것이다.’라고 직접적으로 말할 수도, 문자로 적을 수도 없지만, 손가락을 통하여 가르켜서 물건을 보게 하듯이, 가르키고 지적할 수는 있는 것입니다. 실상(實相)은 본래 문자를 떠나 존재하나, 문자를 빌리지 않으면 실상을 가르켜서 지적하지 못하므로(밝히지 못하므로), 문자는 법신(法身), 즉 부처님의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문자’는 곧 ‘말(언어)’이므로, 이 ‘말(언어)’을 통하여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마음〉은 〈성품〉이므로, 이 성품(性品)이 부처님입니다. 왜냐하면 〈보고, 듣고, 모든 것을 아는〉, 이 성품을 떠나서 〈법신(法身)〉이 따로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러나, 이 말뜻을 알아채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너무 평범하고 항상 하므로 그것을 알아채지 못합니다. 물고기가 항상 물속에 있으면